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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 오후 나의 할머니께서 소천하셨다. 1926년생으로 97세의 인생을 사셨던 나의 할머니는 일제시대에 태어나 한국전쟁을 겪고 격동의 5공화국을 거쳐 밀레니엄과 월드컵 그리고 금융위기와 대통령의 탄핵 그야말로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이었다. 예전에 인터넷 밈으로 본 것 중에 "할머니가 너에게 음식을 주지 않을 때가, 진짜로 살을 빼야할 시기이다."라는 걸 본 적이 있는데, 해외에서나 한국에서나 할머니는 손자에게 그런 존재였나보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유년기의 많은 일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할아버지가 초등학교 5학년 때즘 돌아가시고 그 이후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도 중학교/대학교 때에 돌아가셔서, 나의 조부모 중에는 할머니가 독보적으로 긴 시간을 누리셨으나, 사실 대학생때 이미 할머니는 몸이 편찮아지셔서 요양병원에서 지내온지가 15년은 되었다. 그렇다보니 대학생 이후의 할머니와의 기억은 거의 없다시피했고, 어릴때 할머니의 기억들이 워낙 강렬하기도 한 것도 있다.

그 중 하나만 이야기해보자면, 초등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나 혼자 할머니 댁을 간 적이 있다. 때마침(?) 아버지 일정도 안되기도 했거니와, 나 혼자 어떤 여정을 소화해본다는 것이 하나의 어드벤쳐같은 그런 게 있었다. 할머니 댁은 시골이라, 바로 가는 비행기는 당연히 없고, 새마을 기차/고속버스도 없던 곳. 그래서 제일 가까운 지방의 중소도시 터미널에서 내려서 시골로 가는 시외버스를 타야하는데, 그 시외버스가 여느 시골과 다름없이 하루에 12번? 정도의 노선이 있더랬다. 그리고 고속버스가 요즘처럼 도착시간 예측이 잘 되지 않을 뿐더러, 개인 통신 수단이 전무하던 시기라 갓 10살을 넘긴 나에게는 생각보다 큰 모험이었다. (지금 초4를 데리고있는 내 입장에서봐도 큰 모험인듯) 할머니 입장에서는 어떻겠나, 심지어 친손자가 (게다가 아들; 할머니는 남아 선호가 뚜렷한 분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신체적으로 강한 남자가 살아남기 유리하다고 생각하셨나 싶기도) 본인 집에 '혼자' 온다하니 얼마나 신이 나면서도 걱정이 되었겠는지. 그래서 엄마가 나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그 도시로가는 고속버스를 태우고 전화로 할머니에게 내 차 시간을 알려주면 내가 버스에서 내릴 때, 할머니가 터미널에서 나를 픽업하여 시외버스를 같이 타고 할머니댁으로 가는 스토리였다.

우선 그 도시로 가는 고속버스는 생각보다 좋았다. 버스 자체가 아늑하기도 했지만, 혼자 여정을 한다는 약간의 긴장감과 설레임, 그리고 내렸을 때 할머니를 발견하지 못하면, 나 혼자라도 할머니 댁을 가야 한다는 것, 그렇지 못했을 때에는 지방에 있는 다른 친척에게 연락을 하던지 하는 일종의 plan B까지 마련하게 된 약간의 걱정까지 섞여 진정한 어드벤쳐같았다. 터미널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의 애타는 얼굴을 창밖으로 확인할 수 있었는데 내리자마자 할머니는 욕을 한바가지 퍼부으면서 버스가 왜이렇게 늦게왔냐고 하셨었다. 성격이 매우 급한 할머니이기에 괜히 그런다 싶어서 그냥 넘어갔지만, 나중에 이야기 듣기로는 내가 버스를 타자마자 본인도 그 터미널로 바로 나오셨다고 한다. 그렇게 그 한 자리에서 화장실도 못가고 몇 시간을 기다리니 본인 입장에서는 애가 타지.. 아무튼 그렇게 만난 할머니와 나는 바로 시외 터미널로 가서 할머니댁 가는 시외버스를 탔고, 버스가 출발하기까지 10분정도 시간이 있다고 들었다. 엄청 더운 날이었는데, 시외버스는 그 당시 당연한 이야기지만 에어컨이 없었다. 얼마나 덥던지 앉자마자 땀이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같았다.

하지만 우리가 첫 승객이었기에 우리는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할머니에게 가장 좋은 자리는 뒷문 바로 뒷자리였는데, 시내버스와 달리 시외버스는 승객마다 내리는 정거장이 드문드문 있어서, 내리겠다는 적극적인 의사표현을 하지 않으면 지나치는 버스를 '처절하게' 또는 '구차하게' 잡아 세우거나 그런 일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미리 서있어야 한다. 성격급한 할머니는 오죽했을까.. 그러니 언제든 일어서서 뒷문에 바로 발을 뻗을 수 있는 자리가 당신에게는 가장 좋은 자리였다.) 그렇게 땀으로 범벅이 된 몇분이 지나서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애 한 명이 탔었다. 그 아이는 머리를 묶고 책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듣기로는 시골에서 비교적 높은 교육열을 가진 부모들이 근교의 큰 도시로 방학 특강을 보내기도 한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빨간색 만화 캐릭터 가방을 매고 있었는데 기사 바로 뒷자리에 앉더니 나를 힐끔 보고서는 가방을 무릎위에 올리고 거기서 뭘하나 꺼내서 조금 과장된 몸짓으로 먹는데, 그게 초코파이였다.

나는 그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쳐다볼 수 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가방이 너무 촌스러웠다. 누가 줘도 쓸 것 같지 않던 빨간색의 만화 캐릭터 가방이라니, 거기에다가 의식된 행동 그리고 마지막에 초코파이, 이게 가장 컸다. 이 푹푹 찌는 차 안에서, 초코파이를 저 촌스러운 가방에서 꺼내 먹는다는게 나에게는 큰 충격이라 넋을 놓고 쳐다보고 있었다. 그 눈빛을 그 아이는 의식하듯 더 뿌듯하게 포장을 뜯어 먹는데, 그게 안에서 다 녹아서 짜먹는 수준이었다. 나의 큰 충격과는 상관없이 분위기는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었는데, 내가 그것을 인지했을 땐 이미 늦었다.

그 여자아이는 이미 내가 부러워서 자기를 쳐다본다고 생각하는 듯 했고, 나의 할머니는 그 아이와 나를 번갈아 보다가 나도 초코파이를 먹고 싶어한다는 결론을 내렸던듯 하다. 대뜸 나에게 "우리 강아지, 쬬꼬파이 사줄까? 지금 가서 사가지고 오면 돼." 이 말을 듣고 나서야 일이 잘못되가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적극적이고 강하게 부정을 하며 할머니를 말렸는데, 그걸 그 아이가 듣고 우리를 쳐다보면서 마치 상황이, 할머니가 어렵게 손자에게 초코파이를 하나 사 먹이려 하는데, 착한 손자가 할머니 지갑사정을 걱정하여 '너무 먹고 싶지만' 극구 사양하는 그런 걸로 받아들이는 듯 했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그 아이의 입꼬리가 묘하게 실룩거리면서 승자만이 보일 수 있는 이상한 여유로움이 느껴졌기 때문인데, 30년이 지난 지금도 빡친다. 뭐, 이미 분위기가 이렇게 되어버려서 나의 강한 부정, 할머니의 억센 권고 이 두 개가 절묘하게 저 아이의 만족감만 높여주는 꼴이 되어버렸다. 결국에는 버스기사가 탑승해서 시동을 걸면서 급하게 마무리가 되었으나, 그 실랑이의 마지막에는 할머니의 서운함이 또 욕으로 돌아왔다. "아이, 뭘 좀 먹어야 튼튼해지지. 뭘 쳐먹지를 않으니.." 우리 강아지가 우리 개새끼로 되는 건, 성격 급한 다혈질의 우리 할머니에게는 하루에도 몇번씩은 있는 일이었다. 그 때에도 강아지가 개새끼로 되는 순간 나는 묘한 희열을 느꼈는데, 이게 물귀신 작전이라고 해야하나 ,내가 개 새끼면 내 부모, 내 조부모도 어마어마한 개들인 거니까. 그런 욕을 조부모에게 애정이 담긴채 듣는다는 건 이상한 희열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할머니에게 "할머니 내가 개면, 할머니는 뭐가 되는 거야?" 이렇게 되묻고 서로 웃고 말았다.

유년기의 엄마와의 애착관계는 한 사람을 사회적으로 온전하게 키우기에 중요하다고 한다. 요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게 떠오르는 관계가 조부모와의 관계라고 한다. 부모는 '훈육'이 중요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자식을 혼내야하는 일도 종종 발생하는데, 조부모는 그야말로 무한한 사랑과 환영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당신들도 부모로서는 한가닥 하셨을 법한 분들이 당신 손자들 앞에서는 맥을 못추는 것도 다 그런 이유일 거다. 어느 날 내아들의 할머니에게 내가 물어본 적 있다. 손자는 자식과 다르냐고, 그랬더니 전혀 다르다고.. 뭘 해도 밉지가 않다고 한다. 그게 부모 자식간의 '기대' 그리고 어느정도는 자기의 결핍에 대한 '투영'이 반영되지 않은 순수한 가족관계라 그런건가 싶기도.

아무튼 저런 초코파이 같은 사건이 몇개 더 떠오르지만, 글은 여기서 마무리 하련다. 장례를 치루면서 사촌형들과 이야기도 많이 나눴고, 아버지 손님도 많이 뵈었는데, 97세 이기 때문에 인생 충분히 살았고, '호상'이라는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감히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큰아버지와 고모의 유산 싸움, (3남매 중 막내인 아버지는 유산을 1도 받지 않음) 이후, 할머니의 거동이 불편해지면서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 소위 단물빠진 껌대하듯 대하던 큰아버지와 고모, 그리고 그에 상처받을 할머니를 위해 본인이 선물을 사고 음식을 해가면서 '형'과 '누나'가 보낸 거라고 이야기하면서 근 15여년간을 비밀로 지켜낸 아버지. 어느 누구가 대단하고 어느 누구가 못났다 하는 느낌 보다는, 사회적으로 강요된 숙제인 결혼/출산 그리고 그에 따른 부모의 희생, 자연스레 따라오는 '효도'라는 개념이 얼마나 개개인에게 지키기 힘든 것인지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입관할 때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 평안했는데, 사실 최근 5년은 매일매일이 너무 힘든 날들이었고 요양사가 코로나에 걸려 할머니가 확진된 후, 후유증은 결정적인 원인이었다. 최근 4~5년은 내 앞에서 날 찾는 할머니였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에 할머니는 항상 강하고 큰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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